장희빈 이야기
link  역사나라   2022-01-25

장희빈이 생존한 시기는 숙종 초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극대화되었던 시기이며, 장희빈은 그 속에서 남인과 서인 대립의 기폭제가 된
동시에 남인의 몰락을 가져왔던 인물이다.

15년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14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45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 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1680년(숙종6)에는 경신 환국이 발생하였는데, 남인 영수 허적이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일을 계기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된다.

이 사이에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층으로 재등장하고, 5년 뒤 장희빈이 사형을 당하면서 남인은 몰락하고 이전처럼 재기가 어렵게 된다.

장희빈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다. 본관은 인동이다. 조선시대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했던 인동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연유로 1604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인동 장씨는 장금용을 시조로 하는데, 장금용은 고려시대 대광보국 병상공신 상장군으로 옥산부원군을 지냈기 때문에 본관을 옥산으로 쓰다가 조선말에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되면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장희빈의 부계는 아버지 장형, 조부인 장응인,증조부 장수이다. 이들은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들 때 , 각각 영의정, 우의정, 좌우정으로 승격했다.

장희빈의 조부인 장응인은 역관으로 중국어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쓰고, 풍류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의빈의 종숙부인 장현 역시 주목할 만한데, 1639년 역과에 1등급으로 합격하였고, 1637년(인조 15년)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가서 6년을 머물며 여진족의 사정을 파학했다.

장현은 이미 효종 초기부터 '나라 안의 부자'라고 불릴 만큼 재산을 모았고, 품계가 종일품 숭록대부까지 올라가기도 하였지만 종실, 남인계 인물과의 친분을 이유로 경신환국 때에는 역모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고 유배되는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희빈의 가계는 대대로 역관 가문으로서 재력도 좋았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씨는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처음 발을 들인다. 그녀가 남다른 자색으로 숙종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 것은 1680년 (숙종 6) 인경왕후가 사망한 이후부터였다.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명성왕후 김씨는 장씨와 숙종의 관계를 우려하며 궁밖으로 쫓아냈다.

1681년(숙종7) 인현왕후는 명성황후에게 총애를 입은 궁녀를 여염집에 두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 때문에 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요청했으나 명성왕후는 그녀의 자질이 좋지 않은데, 주상이 꼬임에 빠져든다면 국가의 화가 크게 미칠 수 있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성황후가 사망하자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씨의 일을 아뢰고 장렬왕후 조씨 역시 왕에게 권장함으로써 장씨가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을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은 장희빈은 사약을 먹고 사사되었다. 이일의 여파로 장희빈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 최석정등도 몰락하게 되고 노론을 등에 업은 숙빈 최씨와의 갈등은 이후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계열과 노론 측에 가까웠던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계열간의 갈등의 불씨를 남겨놓은 것으로, 후대 피비린내 나는 경종 초반의 옥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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